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약진 운동 (문단 편집) == 사실 원흉은 [[첸쉐썬]]? == [[파일:external/blog.eteacherchinese.com/clip_image0021.jpg]] 첸쉐썬(1911-2009) 사실 [[마오쩌둥]]이 황당무계한 [[농업]]정책을 세우게 된 계기는 바로 [[첸쉐썬]] 박사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. 첸쉐썬 박사는 [[항저우]]에서 태어나 [[상하이교통대학]]을 졸업했다. 이름은 '교통'대학이지만, 중국어로 교통은 한국어의 자동차 교통이 아니라 소통(커뮤니케이션)을 의미하는 것이고, 이공계열 학과가 다 있는 상하이 최고의 대학교이자 지금도 중국 4대 일류대, 5대 일류대에 속하는 최고의 대학교[* 베이징의 베이징대나 칭화대가 있다면 상하이는 이 학교이다. 상하이교통대 출신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[[장쩌민]]이다.]이다. 즉, 중국 버전 [[MIT]]인 셈이며, 실제로도 [[상하이교통대학]]은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명문대학이다. 첸쉐썬 박사는 그리고 [[칭화대학]] 장학금으로 캘텍(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)에 진학, 테오도어 폰 카르만 교수 밑에서 [[수학]]과 항공[[공학]]의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초음속 비행체 및 유도탄으로 학위를 얻고 1946년, 34세의 나이로 [[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]] [[교수]]를 역임한 세계적 [[과학자]]로서, [[매카시즘]] 시절에 [[미국]]에서 중공의 [[간첩]]이라는 혐의를 받고 [[한국전쟁]]에서 잡힌 미국 포로와 교환되어 1955년 중국으로 추방되었다. 결국 미국은 스스로 중국에 미사일 개발 1급 인재를 넘긴 셈이었다. 그리고 첸쉐썬을 [[중국]]으로 추방시킨 원인이었던 [[매카시즘]]은, 현재 오히려 [[미국]]의 안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더 악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. 첸쉐썬이 중공의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은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, [[인종차별|그가 중국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.]] [[중국]]은 이렇게 [[미국]]에서 쫓겨난 첸쉐썬 박사를 대대적으로 환영했고, 첸 박사는 중국의 미사일 개발을 담당하며 마오쩌둥을 자주 만났다. 세계적인 학자였던 첸쉐썬은 마오를 만난 자리에서 "중국을 금방 미국처럼 발전시킬 수 있다"고 말했고, 자신의 논리를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. 첸쉐썬의 기본 논리는 '''단위 면적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곡물을 빽빽하게 심어야 한다'''는 것이었다. 작물은 [[태양]] 에너지에 의해 자라는데, 태양 에너지는 충분하므로 물과 비료만 계속 공급하면 작물 생산을 20배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. 문제는 이런 것을 그냥 예상만 한 것이 아니라 '''구체적인 수치'''로 계산해서 정말로 그럴듯하게 보였다는 점. 전직 [[MIT]] 교수가 구체적 수치까지 제시하는데 넘어가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. 마오쩌둥은 이 말을 듣고 솔깃해서, "신묘한 계책"이라고 하며 대약진운동을 추진했고, 결과는 [[http://www.chinauncensored.com/index.php/think-tank/103-controversial-scientist-qian-xuesen|망했어요]]. 문제는 첸쉐썬 박사는 일급 [[과학자]]였지만 '''[[농학]]은 전공하기는 커녕 [[식물학]]의 기본도 모르는''' 사람이었다는 것이다. 너무도 당연한 소리지만 저 계산에서 제일 잘못된 부분은 태양 에너지가 무한하다는 부분. 당연히 태양은 알아서 핵융합을 해서 열과 빛을 만들어 내니 지구 입장에서는 (거의) 무한한 에너지원이지만, 태양이 무진장의 에너지를 뿜어낸다고 해도 식물이 한 번에 수급할 수 있는 태양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다. 괜히 식물들이 줄기의 몇 십 몇 백 배 면적에 해당하는 공간에 이파리를 줄줄히 늘여놓는 것이 아니다. 이 공간에 다른 식물이 난입하면 자연스럽게 에너지 수급에 문제가 생기고 생장이 제대로 안 된다. 박사는 순전히 책상머리 계산만 가지고 '비료 증원 + 파종 밀집도 증가 = 식량증가'라는 [[방정식]]을 만들어서 검증도 없이 게시한 셈이다. 그렇지만 천쉐썬의 주장이 [[마오쩌둥]]에게 실질적으로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둘째치고, [[중국]]의 문호개방이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었기에 근대 시절의 지옥을 맛보고도 [[중일전쟁]] 종결 당시에 이미 유학파 박사들만 수천 명이나 있었고, 공산당을 민주적 정당이라 믿어 [[장제스]]를 따라가지 않고 공산 중국에 잔류한 유학파 전문가들이 가득한 상황이었다. 오히려 이들 유학파 전문가들은 대부분 [[부르주아]] 반동들로 몰려서 당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핍박과 형편없는 대접만 받고 있었고, 이들의 분노가 백화제방 운동 때 폭발하기도 했다. 첸쒜썬은 마오쩌둥의 "15년 안에 [[미국]]을 따라잡겠다"는 뇌내망상을 뒷받침할 [[개소리]]를 했기 때문에 마오가 솔깃한 것이지, 만약 첸쒜썬이 "마오쩌둥의 구상은 불가능하다"고 직언했더라도, 마오가 '아 미국 출신 박사가 그랬으니 안 되겠구나!' 하고 깨달았을 가능성은 없다. 그땐 오히려 첸쒜선이 미제의 간첩이랍시고 숙청당했을 것이다. 예를 들어 대약진운동 초기에 "[[황하]]를 푸르게 만들겠다"는 마오쩌둥의 말도 안 되는 치수사업을 비판했던 미국 유학파 학자인 황안리는, 마오쩌둥에게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"개소리하지 말라"고 욕이나 먹고 숙청당했다. 대약진운동이 개판으로 돌아갈 동안 첸 박사는 비난을 피했음은 물론이고, [[중국]]의 우주개발을 이끌며 [[핵무기]] 제조까지 감독했다. 중국의 1세대 미사일과 인공위성, 핵무기는 모두 그가 이끈 연구팀이 만들어냈다. [[한국]]에서 알려진 [[이휘소]] 신화의 상당부분은 전직 MIT-Caltech 교수였던 첸쉐썬이 중국에서 실제로 이뤄낸 일이다. 중국이 [[문화대혁명]]이라는 국가 멸망에 가까운 사태 중에도 항공 공학이나 미사일 면에서 기술축적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, 마오가 비판의 화살을 맞는 동안 무사했던 그의 덕이 크다고 볼 수 있다. 물론 설령 첸 박사가 저런 헛소리를 했다 하더라도, 최종 결정권자는 마오쩌둥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책임은 그에게 돌아간다. 첸 박사가 당시 [[소련]]을 주름잡던 사이비 농학자 [[트로핌 리센코]]의 농법을 일부 채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. 다만 트로핌 리센코는 원래 농업 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한 농업연구원 경력자였고, 당연히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이 제대로 작동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. --대신 자기 계획을 말아먹었다--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